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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버지와감나무

2007/01/06



아는 후배의 집을 다녀오다 나는 감나무 잎사귀로 내리고 있는 빗방울들을 보았다. 동그란 감위로 동그란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엊그제까지 송아지의 눈망울 만큼의 크기 였는데 어느 사이 자랐는지 신기하기도 하였다.

지난 봄 이제는 폐교가 된 후암동 수도여고 자리에 주차하러 갔을 때는 감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감꽃을 볼 때마다 막내 이모생각이 난다. 이모는 늘 이렇게 감꽃처럼 수줍게 웃고 있었다. 외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모는 늘상 감나무 닮은 여인이었다. 사실 나중에 알았지만 감나무는 한 가지라도 버릴 것이 없는 나무이다

초등학교 때만해도 나는 단감나무가 있는 막내 이모네를 다니러 가곤 했다. 이모는 늘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당시 딸만 낳는다고 구박을 받던 이모는 감나무를 쳐다보는 나의 눈길을 먼저 알고는 대나무 장대를 들어 단감 몇 개를 따서 내게 얼른 건네주었다. 이모의 얼굴도 나의 놀라는 눈망울도 그리고 감을 받아든 나의 기쁨을 쳐다보는 이모의 마음도 모두 감처럼 둥글었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감에 관한 아픈 추억이 있다. 당시 아버지는 삼대 독자였는데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초 겨울날 나는 아버지 몰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광에 놓아둔 감 몇 개를 훔쳐 먹은 적이 있다. 하루에 한개 씩은 괜찮았으나 여러 날이 지나다 보니 상당한 양이 없어진 것을 아버지가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감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할아버지 제사를 소홀히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아홉 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무렵까지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계셨다. 그런데 제사를 지낼 감이 없어지다니...

그날은 마침 내가 읍내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날이어서 가엾은 여동생들만 혼이 났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일에 대해 여동생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감나무를 사서 텃밭에 심었다. 당시 집 뒷쪽에 있는 텃밭은 아버지가 심어놓은 작약꽃 모란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마다 감나무를 심던 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만일 상급학교를 간다면 입학금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당시 나는 상급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막연한 꿈들이 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 날 감나무 밭에서 바라보던 파아란 하늘처럼...그래서 읍내에 있던 중학교에서 토요일이면 달려와 감나무 밭을 걸으면서 감나무 하나하나 마다 눈길을 주었다.

그것을 감나무와의 대화 정도로 표현하면 어떨까...나는 그 후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도 마음속에는 감나무를 친구삼아 데려오곤 했다. 그리고는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생기면 시골의 텃밭을 채우던 감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혹은 가을이면 감나무에 감이 얼마나 열리는지 편지로 묻곤 했다.

내가 관찰하기로는 감나무는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아도 잘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사람이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감나무는 많은 수확만을 일방적으로 주는 나무이다. 그래서 나는 '아낌없는 주는 나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아마도 우리나라에 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감나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더구나 시대의 상처는 나를 가끔 고향으로 내몰았고, 그럴 적마다 고향에서 나를 반겨 준것은 들판에서 일하던 엄마의 얼굴과 감나무였다. 때론 못 마시는 술로 상한 나의 속을 챙겨 준 것도 감나무가 나에게 준 감 열매였다. 그리고 가을 무렵이면 아버지는 몇 개의 감을 따서 상자에 담아 서울로 가져오곤 했다. 감은 시절의 변화를 알리는 도구이기도 하였던 셈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시장에서 파는 감의 가격을 말하며, 다음 해에는 고생하지 마시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시골에서 서울까지 오시는 아버지의 고생을 생각하면서 드리는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못내 서운해 하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버지는 감나무가 자라고 수확을 하는 것을 마치 내가 커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계셨다. 물론 나는 어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감나무가 자라듯 아버지의 소망을 채워드리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초겨울 무렵에도 감나무에는 몇 개의 감이 남아 있었다. 이것을 까치밥이라고 부르곤 하였는데...배고픔에 지친 까치들을 위한 사람들의 배려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어렵던 시절에는 이웃간의 정이 남달라서 작은 음식이라도 나눠먹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 좋은 풍습이 새들에게만 예외 일수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이 가듯 감나무에 대한 생각들도 차츰 옅어져 갔다. 자본주의는 세상의 진귀한 과일들을 시장에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마치 도시의 밤거리를 매우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감나무에 달린 감 열매의 빛을 넘어서듯이 말이다.

세월을 따라 아버지도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럼에도 돌아가시던 무렵까지 나는 아버지 세대와 불화를 이어갔다. 지금도 그 모습이 기억난다. 마치 사찰의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울리듯, 지금도 나의 가슴을 치고 있다. 내가 살던 집의 대문을 열고 나서던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무렵까지 아버지를 위해 더운 밥 한 그릇을 대접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속상해 하신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한 겨울날의 서늘함처럼 나의 양심을 때려온다. 그 죄의식의 촉수가 발을 내밀어 마치 아버지가 말하듯이 내게 말하곤 한다. 내 가슴을 부여잡고 삶의 의미를 캐묻곤 한다.

물론 나는 늦게야 감나무를 심은 아버지의 뜻을 조금은 알것 같다. 세상을 방황하며 이루지 못한 꿈을 꾸시던 아버지....험한 세상을 만나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늘 그리움으로 가득 찬 가슴을 내게 열어 보이시던 아버지...

감나무에 열린 조그만 감 열매를 보면서 나는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잎마다 감열매마다 매달린 물방울들이 아버지의 나를 향한 소망처럼 보였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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